
1. 어메이징 그레이스 줄거리
한 젊은 정치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앙적 깨달음을 통해 복음주의 단체에서 앞날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신학으로 믿음을 전하는 일을 할지 아니면 주변 친구들이 권유하는 하나님의 일인 노예무역 폐지 운동에 인생을 걸고자 한 청년이며, 정치인이자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턴 목사에게 찾아가 두 주제로 자주 상담을 하며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주변 친구인 피트는 총리가 되고, 정치적 탐욕과 인간의 우월권을 상대로 어느새 윌버포스는 노예폐지 법안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피트가 총리로서 길을 마련해주었으나 노예무역의 기득권을 대표하는 의원 공동체에 밀려 법안은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윌버포스는 프랑스혁명 전쟁에 정신없는 피트 없이 혼자 싸워나가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음에 괴로워하며 병까지 얻게 됩니다.
56년간의 수많은 정치와 150번에 캠페인과 입법 추진의 시도 끝에 , 1807년 드디어 영국 의회를 통과한 노예무역 폐지는 역사에 뒤안길에 사라집니다.
"기독교는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하며 권력자에게 겸허하게 직책에 맞는 책임을 완수하라고 가르친다. 그 마음은 부유함을 자랑하지 않고, 권력을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불평등으로 갈등을 겪는 사회적 어려움이 줄어든다. 또한 기독교는 모든 인간은 차별 없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이름뿐인 기독교는 이 일을 실현하지 못한다. 참된 기독교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런 선한 일들이 실현되고, 정치가 부패하지 않게 하려면, 성경 중심에 참된 믿음을 배양해야만 한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집필한 진정한 기독교중 발췌
2. 윌리엄 윌버포스와 존 뉴턴(튼)
존 뉴턴은 신앙을 가진 경건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는 아들을 목사로 만들기 위한 꿈이었습니다. 뉴턴이 6세 되던 해 어머니의 소천과 뱃사람인 아버지의 재혼은 뉴턴을 비뚤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방탕함은 스치는 바람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갇히다 못해 아예 사회에서 겪리를 시킬 정도였습니다.
1784년 5월 10일 23세때였습니다. 그는 노예무역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폭풍우가 배를 삼키는 순간에 뉴턴은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는 바다에서 온 힘을 다해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이 일 이후에 그는 노예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며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며 회심하게 되며, 노예상인에서 벗어나려고 준비했습니다.
25세에 결혼 후 아내가 전해준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은 리버풀에서 조수 측량사로 이직했을 때 인생의 전환이 된 책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여가시간에 성경과 헬라어, 히브리어, 아람어, 라틴어를 공부하며 신학에서 특히 원어 실력을 쌓아가며 원전을 공부했습니다.
그의 변화를 본 많은 이들이 목회를 종용하고 뉴턴은 요크의 대주교에게 안수를 요청하였으나 거절을 통보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신학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조지 휫필드와 요한 웨슬레와도 교류하며 한층 더 신학과 신앙 그리고 목회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39세 때 드디어 링컨의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고 43년간 목회 사역을 하게 됩니다.
54세 때 런던 메리 울 노스 교회에 부임한 뉴턴은 가난한 자들, 상인, 부자, 유력인사 등 사회의 모든 이들과 편견 없이 거리를 두지 않는 목회를 하였습니다. 이때 뉴턴은 영국에 하원의원인 윌리엄 윌버포스를 만나며 그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또한 선교사 윌리엄 캐리와 헨리 마틴 등도 뉴턴을 통해 더 큰 신앙의 확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뉴턴은 찬양 한곡의 가사를 붙입니다. 바로 어메이징 그레이스이며 이것은 곧 교회에서 불리기 시작합니다.
82세에 뉴턴은 소천합니다. 죽기 3년 전 실명 상태에서도 그는 노예상인이었던 자신의 과거로 인해 끊임없는 반성으로 괴로워하며 전도와 설교 목회 그리고 노예해방운동을 쉬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9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나 요크셔의 킹스턴 어폰 헐에서 부유한 가문의 독자로 출생했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17세에 입학합니다. 이때 할아버지와 숙부의 적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학사와 석사 그리고 그리스 고전에 해박하다고 알려질 정도로 열심히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친구이자 영국에 수상이 될 윌리엄 피트를 만납니다.
21살에 무소속으로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신사다운 정치가'라고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26살에 재선 후 잠시 여행을 떠났을 때 필립 도드리지의 '영혼에서 종교의 등장'을 읽고 철저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됩니다.
정치인으로서 신앙적 회의가 들 때마다 새벽기도와 성경을 읽으며 성경의 진리를 기준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정치인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그는 런던시티의 성 메리 울 노드 교구 목회자인 존 뉴턴을 찾아 상담을 통해 정치로 인해 회의감이 든 마음을 다시 잡고는 했습니다.
이때 뉴턴과 함께 노예무역선에서 의사로 일한 제임스 람제이 목사로부터 노예무역의 비참함을 전해 듣고 뛰어들게 됩니다. 람제이 목사는 찰스 미들턴, 토마스 클락스, 한나 모아 등과 함께 노예무역 금지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윌버포스는 기도하며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간구했고, 노예 무역상들과 노예 소유주들의 협박에도 피하지 않고 주야로 기도했고 결국 이뤄집니다.
3. 머물 자리

영국의 당시 노예문제의 심각성은 존 뉴턴이 조수 측량사로 일한 리버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리버풀을 얘기할 때 리버풀의 아버지라 불린 토마스 존슨 경은 최초의 노예 선박 소유권자였으며, 아버지의 재산인 노예 선박으로 재산을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의회에 입성하고 왕실에 리버풀을 각인시키고 부두 건설을 추진해 리버풀을 발전시켰습니다.
이후 이주한 존 글래드스톤의 아들 윌리엄은 노예제를 찬성하고도 총리를 4번이나 연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리버풀 대학 내에서 학생들이 이름을 삭제하자는 운동이 벌어질 정도로 노예 문화의 잔재는 아직도 영국 내에서 골칫거리로 남아있습니다.
신앙의 옳고 그름을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에서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인생을 바친 한 청년 정치인이 노년을 살아가기까지 꺾지 않은 신념이 있습니다.
정치와 신념과의 관계에서 성경의 기준을 벗어나지 않음을 정치로써 굳건히 지켰던 한 정치인과 그것을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노예제를 옹호했던 이들은 현시대에도 동일하게 어긋나지 않고 존재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서 빼앗아 간것은 자유였으며,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 청년의 회심이 있었습니다. 정치적 문화의 기준을 성경의 기준 위에 놓지 않았던 윌리엄 윌버포스의 생각들은 아직도 그가 쓴 신학 저서들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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